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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플래닛》(Mira, 2022)은 지구를 덮친 사상 초유의 소행성 재난 속에서, 우주정거장에 홀로 남은 아버지가 인공지능(AI)과 지구의 디지털 네트워크(CCTV, 신호등 등)를 해킹해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을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SF 재난 감동 대작입니다. 과거의 상처로 소통을 단절했던 부녀가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서 기술을 매개로 다시 연결되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테마인 '디지털 기술을 통한 시공간의 초월한 단절 관계의 복구'를 영화에 녹여냈습니다. 영화가 처럼 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주와 지구를 연결하는 서사구조
이 영화의 뼈대는 생각보다 탄탄합니다. 소행성 군집이 지구로 접근하는 재난 상황 속에서, 우주 정거장에 홀로 남은 아버지 아라보프가 지상의 딸 레라를 원격으로 지켜보고 돕는다는 구조는 꽤 영리한 선택입니다.
여기서 핵심 장치가 바로 CCTV 해킹과 스마트 인프라 제어입니다. 아라보프는 인공지능 '미라'를 활용해 도시의 신호등과 전광판을 원격으로 조종하며 레라에게 대피 경로를 안내합니다. 제가 과거 해외 IT 기업의 원격 관제 엔지니어로 일한 적이 있어서 이 설정이 특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스마트시티 인프라의 중앙 관제 시스템에는 ICS(산업 제어 시스템)라는 구조가 쓰입니다. ICS란 발전소, 교통망, 수처리 시설 같은 도시 기반 시설을 원격으로 운영하는 제어 체계를 말하는데, 적절한 권한만 있다면 신호등이나 안내판을 외부에서 제어하는 것 자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초반부 시퀀스는 오히려 제 경험과 맞닿아 있어서 몰입도가 높았습니다.
레라의 서사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육상 선수이지만 결승선에서 갑작스러운 공황 발작을 겪습니다. 공황 장애(Panic Disorder)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극도의 공포와 신체 증상이 동반되는 불안 장애의 일종으로, 실제로 고강도 운동선수에게도 드물지 않게 발생합니다. 국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공황 장애 진료 인원이 2022년 기준 약 2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출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이 캐릭터 설정이 단순한 감정선 장치가 아니라, 실제 증상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영화가 설정한 맥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소행성 군집이 예상보다 훨씬 넓어 대규모 지상 충돌 발생
- 아라보프는 우주 정거장에서 AI '미라'와 함께 딸의 동선을 추적
- 레라는 동생 예고르를 찾기 위해 대피소 대신 위험 지역으로 이동
- 아라보프는 딸과의 연결이 끊길 때마다 도시 인프라를 조작해 신호를 보냄
개연성의 균열, 어디서부터 무너지는가
문제는 중반 이후입니다. 이 영화가 SF 장르를 표방하는 이상, 최소한의 과학적 개연성은 지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그 선이 계속 무너집니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기절한 남사친의 로봇 의수(義手)에 아라보프가 원격으로 접속해 레라의 손을 잡는 부분입니다. 의수란 팔이나 손을 잃은 사람을 위해 제작된 보조 기기로, 근전도 신호를 읽어 동작하는 고기능 전동 의수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외부 네트워크에서 타인의 의수를 실시간으로 원격 제어한다는 설정은 현재 기술 수준은 물론, 의료기기 보안의 기본 원칙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실제로 미국 FDA는 2023년 의료기기 사이버 보안 지침을 통해 외부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핵심 원칙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U.S.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제가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에도 외부 접근 권한 설계는 가장 먼저 막아야 할 취약점으로 다뤄졌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감동적이기 전에 먼저 의아했습니다.
또 하나는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에서 인공지능 미라가 자체적으로 모든 시스템을 재가동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는 페일세이프(Fail-safe) 개념이 암묵적으로 등장합니다. 페일세이프란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자동 전환되는 설계 원칙을 말합니다. 실제 우주 정거장 시스템 설계에서는 전원 이중화와 비상 전력 회로가 핵심인데, 영화는 이 부분을 '부성애'라는 감정 하나로 대체해 버립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초반의 정교한 설정이 쌓아 올린 신뢰를 후반부가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의 방임이라는 현실적 과오를, 우주에서의 숭고한 희생이라는 극단적 장치로 너무 손쉽게 봉합하는 방식은 아버지라는 캐릭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원천 차단합니다.
가족서사가 남기는 것과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
그럼에도 이 영화가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레라와 아라보프의 관계를 떠받치는 감정의 핵심은 트라우마(trauma)입니다. 트라우마란 과거의 충격적 경험이 현재의 행동과 감정 반응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레라는 어린 시절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 아버지가 가족을 떠났다는 사실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6년간 상처를 안고 살았고, 아버지는 죄책감으로 인해 오히려 더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 구조는 심리학적으로도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저도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원격 근무로 가정에 소홀해진다는 죄책감이 쌓이면 오히려 연락을 더 끊게 되는 역설적인 심리, 그 감정이 아라보프에게서 보였고 그래서 초반에는 꽤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 공감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했습니다.
레라가 유조선의 화재 진압 시스템을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클라이맥스는 트라우마를 직접 마주하고 극복하는 서사로 읽힙니다. 이건 분명히 잘 만든 장면입니다. 공황 발작을 겪던 선수가 불을 마주하고, 두려움 속에서도 도시 절반을 지키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은 감정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직전까지 쌓인 개연성의 균열들 때문에 감동이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플래닛》은 잘 만든 SF의 조건을 절반쯤 갖춘 영화입니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매개로 한 부녀 서사라는 아이디어는 분명히 참신하고, 레라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저는 후반부의 설정을 어디까지 납득하며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기술적 개연성보다 감정적 설득을 먼저 앞세우는 방식이 통할지는, 결국 관객 각자의 허용 범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재난 SF를 좋아하되 논리적 허점에 예민하신 분이라면 전반부까지만 좋게 기억하시는 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