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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저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켰습니다. 밀린 메일, 포털 상단을 장식한 자극적인 뉴스들, 그리고 누군가의 근사한 일상 사진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습관이 저를 살아내게는 해줬지만, 살아가게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야 그 차이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히라야마의 심리적 방어기제
영화는 철저히 선형 서사(linear narrative) 구조로 진행됩니다. 선형 서사란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일직선으로 전개되는 서술 방식으로, 역순행이나 교차편집 없이 하루하루가 그대로 쌓이는 형식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단순한 구조가 오히려 히라야마의 복잡한 내면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폭제가 된다는 점입니다.
히라야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루트로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장면들이 그저 잔잔한 힐링을 위한 연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흘러나오는 'House of the Rising Sun'의 가사를 찬찬히 곱씹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노래는 잘못된 삶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는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노래에 맞춰 활기차게 핸들을 두드리는 히라야마의 표정과 겹쳐지면, 그의 정갈한 일상이 평온의 결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애써 외면하기 위한 구조물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란 불안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전략을 말합니다. 히라야마가 탐독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의 정렬과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일레븐은 공통적으로 일상에서 도피하는 인물들의 불안을 다루는 소설입니다. 제가 직접 읽어보니, 두 작품 모두 표면적으로는 잠잠해 보이는 인물들이 내면에 상당한 균열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히라야마와 정확히 겹쳐졌습니다.
그의 꿈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꿈속 피사체는 흐릿하고 전체 화면은 흑백입니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이론에서 응축(condensation)이란 낮 동안 접한 이미지와 감정이 과거 경험, 억압된 욕구와 뒤섞여 하나의 꿈 이미지로 압축되는 과정입니다. 쉽게 말해, 꿈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은 그가 의식적으로 선명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감정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의 단절, 포기한 삶의 어떤 조각들. 히라야마는 그것들을 습관이라는 형식으로 덮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히라야마의 심리 구조에서 주목할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복되는 일상 루틴은 의도적으로 설계된 심리적 방어막
- 선택한 음악과 소설 모두 불안과 후회를 다루는 내용
- 흑백 흐릿한 꿈은 억압된 욕구가 응축되어 표출된 결과
- 아버지와의 단절이라는 과거가 현재 삶의 간결함을 설명하는 열쇠
살아가기의 의미 그리고, 찰나의 존재를 쫓는 삶
서울의 어느 골목을 걷다가 저는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이 있습니다. 콘크리트 벽 틈새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 위로 오후 햇살이 부서지듯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짧게는 몇 초였는데, 한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히라야마가 공원에서 나뭇가지 사이 햇살을 필름 카메라로 찍는 장면을 보면서 그 순간이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히라야마가 식물을 가꾸고 빛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는 단순한 취미가 아닙니다. 식물과 햇살은 모두 찰나성(transience)을 가진 존재입니다. 찰나성이란 주의를 조금만 게을리해도 사라지거나 변질되는 속성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교체되는 현대 사회에서, 히라야마는 의도적으로 그 흐름에 역행하는 삶을 택한 것입니다.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로 70, 80년대 팝송을 듣고 절판될 것 같은 소설을 정독하는 습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부분에서 저는 영화의 시선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히라야마의 일상을 아름답게 그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그 일상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질문은 비껴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구조적 소외나 사회적 결핍 없이 개인의 시선 전환만으로 완벽한 하루를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는, 현실에서 그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영화의 후반부는 이 한계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조카 니코와 만남 이후 히라야마는 철칙 같던 루틴을 조금씩 미루기 시작합니다. 선술집 사장의 전 남편 토모야마와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두 그림자가 겹칠수록 더 어두워진다는 대사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담담하게 전달합니다. 인지행동치료[(CBT, Cognitive Behavioral Therapy)는 전 세계 심리학 및 정신의학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 된 전문 심리치료 기법.]에서는 행동의 작은 변화가 사고 패턴 전체를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히라야마가 습관을 조금씩 어기는 행위 자체가 이미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라는 뜻입니다. 이 점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빔 벤더스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독일 문화권 영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단순한 로드무비나 힐링 영화로 분류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소외를 탐구하는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로 설명합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퍼펙트 데이즈 역시 그 맥락에서 봐야 마지막 장면의 무게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그 얼굴은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삶의 복잡성을 그대로 안고 앞으로 가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영화 심리학 연구에서도 복합 감정(mixed emotion)이 단일 감정보다 더 성숙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 저도 아침에 스마트폰을 드는 습관을 하루만 미뤄봤습니다. 그날 오전이 조금 달랐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살아내는 대신 살아가려고 잠깐 애썼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가 모든 질문에 답을 주지는 않지만,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셨다면, 빠르게 스크롤하지 말고 히라야마의 하루 속도로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dPaApZc5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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