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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심리적 방어기제, 살아가기의 의미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 심리적 방어기제, 살아가기의 의미

     

     

     

    매일 아침 저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켜곤 했습니다. 밀린 메일, 포털 상단을 장식한 자극적인 뉴스들, 그리고 누군가의 근사한 일상 사진들까지.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하루가 시작되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습관은 저를 하루하루 '살아내게'는 해줬을지언정,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야 저는 그 한 끗 차이의 의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심리적 방어기제

    영화는 철저히 시간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선형 서사(linear narrative) 구조를 취합니다. 역순행이나 화려한 교차편집 없이, 그저 주인공 히라야마의 하루하루가 담담하게 쌓여가는 형식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극도로 단순한 구조가 오히려 그의 복잡한 내면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기폭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히라야마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루트로 출근하며, 늘 같은 자리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처음에는 이 장면들이 그저 관객에게 잔잔한 힐링을 주기 위한 연출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영화 초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애니멀스의 'House of the Rising Sun' 가사를 찬찬히 곱씹으면서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노래는 잘못된 선택과 삶에 대한 깊은 후회를 털어놓는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쓸쓸한 노래에 맞춰 활기차게 핸들을 두드리는 히라야마의 표정이 겹쳐지는 순간, 그의 정갈한 일상은 평온의 결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애써 외면하고 도망치기 위해 세워둔 거대한 구조물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볼 때, 히라야마의 이 완벽한 규칙성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강력한 '심리적 방어기제'에 가깝습니다. 그가 매일 밤 탐독하는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의 정렬>과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일레븐> 역시 표면적으로는 잠잠해 보이지만 내면에 깊은 균열과 불안을 품은 채 일상으로 도피하는 인물들을 다룹니다. 영화 속 인물과 그가 읽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정확하게 오버랩되는 지점입니다.

     

    그가 매일 밤 꾸는 기묘한 꿈 장면들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꿈속의 피사체들은 늘 흑백으로 흐릿하게 뭉개져 있습니다. 낮 동안 억압해 두었던 과거의 상처나 아버지가 상징하는 가족과의 단절, 그리고 포기해 버린 삶의 파편들이 밤이 되면 무의식 속에서 융합되고 응축되어 발현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꿈속에서조차 대상을 선명하게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을 직면했을 때 찾아올 마음의 붕괴를 두려워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히라야마는 '습관'이라는 가장 안전한 형식으로 과거의 유령들을 꼭꼭 덮어두고 있는 셈입니다.

     

     

     

     

    살아가기의 의미

    서울의 어느 복잡한 골목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이 있습니다. 회색 콘크리트 벽 틈새로 피어난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듯 내리쬐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찰나에 불과했던 그 시간이 한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원인 모를 불안감을 씻어내주는 듯한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히라야마가 공원 벤치에 앉아 나뭇가지 사이로 흩어지는 햇살(코모레비)을 필름 카메라로 정성스레 담는 장면을 보며, 저는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히라야마가 작은 식물을 가꾸고 순간의 빛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섭니다. 식물과 햇살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내 사라져 버리는 강력한 '찰나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유행에 따라 교체되는 현대 사회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아날로그 카세트테이프를 듣고 절판된 소설을 읽으며 이 빠른 흐름에 저항합니다.

     

    물론 영화를 보며 이 시선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히라야마의 일상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데 집중하느라, 그 고요한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조건이나 사회적 소외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슬쩍 비껴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개인의 시선 전환만으로 완벽한 하루를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자칫 공허한 울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영화 후반부는 이러한 한계를 스스로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조카 니코와의 만남 이후, 히라야마는 철칙 같았던 루틴을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선술집 사장의 전 남편과 밤골목에서 어린아이처럼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며 "그림자가 겹치면 더 어두워진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세상에 영원히 고여있는 것은 없다는 서글픈 깨달음을 담담하게 전달합니다. 심리학의 인지행동치료 원리처럼, 매일 반복되던 행동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만으로도 그의 단단했던 심리적 방어막과 사고 패턴 전체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빔 벤더스 감독은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소외라는 무거운 주제를 날카롭게 탐구해 온 거장입니다. <퍼펙트 데이즈> 역시 단순한 힐링 영화의 프레임으로만 봐서는 마지막 장면의 거대한 무게감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습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히라야마의 마지막 롱테이크 표정은 울음과 웃음이 뒤섞인 기묘한 복합 감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상처가 완벽히 치유되어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인생의 복잡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내 삶의 일부로 껴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걸어가겠다는 성숙한 어른의 위대한 선언에 가깝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 아침, 저 역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던 손길을 딱 한 시간만 미뤄보았습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내는 타성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잠깐 애써본 그날 오전의 공기는 분명 평소와 달랐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삶의 찰나를 응시할 때, 우리의 평범한 하루도 비로소 '퍼펙트 데이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7dPaApZc5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