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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운전사가 시인일 수 있을까요? 더 정확히 물어보면, 버스 운전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저도 한때 매일 똑같은 노선을 반복하며 운전대를 잡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운전석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관람석이었다는 걸,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패터슨을 보고 나서야 제대로 언어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층구조 - 제목 하나에 세 개의 세계가 겹쳐 있다
영화 패터슨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제목 자체의 다층구조(multi-layered structure)입니다. 여기서 다층구조란 하나의 텍스트 안에 서로 다른 의미 층위가 동시에 작동하는 서사 방식을 말합니다. 단순히 은유를 쓴다는 게 아니라, 제목 하나가 동시에 세 가지 실체를 가리키는 구조입니다.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주인공의 이름이 패터슨이고, 영화의 배경 도시인 뉴저지주 패터슨이 있으며, 20세기 미국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쓴 서사시의 제목 역시 패터슨입니다. 그 서사시는 뉴저지주 패터슨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입니다. 제목 하나가 인물, 도시, 문학 작품을 동시에 지칭하는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 안에서 이 우연들이 전혀 강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등장인물들은 이 세 가지 일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누구도 놀라지 않습니다. 덕분에 관객은 세 층위를 동시에 의식하면서 영화를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장치가 처음엔 그냥 우연처럼 느껴졌는데, 보고 나서 곱씹을수록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설계인지 감탄했습니다.
탈신화화 - 예술가는 왜 자기 파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영화가 정면으로 맞서는 관습이 있습니다. 예술가, 특히 시인은 극단적인 경험이나 자기 파괴적인 삶을 거쳐야만 위대한 작품을 남긴다는 신화입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이 그 반대편 극단에 있는 작품이라면, 패터슨은 그 신화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반박합니다.
탈신화화(demythologization)란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덧씌워진 과장된 이미지를 걷어내고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이 작업을 수행합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20세기 미국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뉴저지주에서 소아과 의사로 평생 일한 사람입니다. 낮에는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밤에는 시를 썼습니다. 극단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영화 속 패터슨도 그렇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버스를 운전하고, 승객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점심 도시락을 꺼내 폭포 옆 벤치에 앉아 노트에 시를 적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이 장면들이 남달리 와닿았습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 창밖으로 지나가는 계절 색깔 하나,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대화 조각 하나가 퇴근 후 노트에 고스란히 옮겨지던 그 감각이요. 글쓰기가 특별한 환경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그 시절 몸으로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적미학 -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는 법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론(詩論)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관념이 아닌 사물을 통해 말하라(No ideas but in things)." 여기서 이 원칙이란 추상적인 감정이나 개념을 직접 서술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물과 장면을 통해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는 시작법(詩作法)의 핵심 명제입니다. 예를 들어 "슬프다"고 쓰는 대신 빗속에 젖은 붉은 외바퀴 손수레 한 대를 묘사하는 방식입니다.
영화 패터슨은 이 원칙을 스크린 위에 그대로 구현합니다. 주인공이 쓰는 시들은 성냥갑, 폭포, 버스 창밖 풍경처럼 지극히 사소한 사물에서 출발합니다. 대단한 감정 고백도, 철학적 선언도 없습니다. 짐 자무쉬 감독의 미장센(mise-en-scène) 역시 이 원칙과 일치합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배경 등 화면을 구성하는 모든 시각적 요소의 배치를 뜻하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과장된 색감도, 극적인 카메라 움직임도 없습니다. 그냥 사물을 그 자리에 놓고 가만히 바라봅니다.
이 미학은 하이쿠(haiku)와도 닿아 있습니다. 하이쿠란 일본의 전통 단시 형식으로, 5-7-5 음절 구조 안에 계절어(키고)를 포함하여 자연의 순간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시 장르입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도 하이쿠를 즐겨 썼고, 짐 자무쉬 감독 역시 동양 미학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감독입니다. 이 영화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흔적을 찾아온 일본인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낭만화의 함정 - 아름다운 영화가 감추는 것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좋은 감정이 지속됐는데, 며칠 뒤에 문득 불편한 질문이 따라왔습니다. 이 영화, 혹시 너무 예쁘게 포장된 거 아닐까요?
영화는 주인공의 일주일을 거의 갈등 없이 그립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기르던 개가 비밀 노트를 찢어버리는 장면인데, 주인공은 이조차 담담하게 수용합니다. 노동자계급(working class)의 삶을 소재로 하면서 그 삶에 실제로 존재하는 피로, 권태, 경제적 압박을 철저히 비켜갑니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이란 육체노동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하며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 경제적 집단을 가리킵니다.
서사학(narratology) 관점에서 이 선택은 의도적인 갈등 회피(conflict avoidance)에 해당합니다. 서사학이란 이야기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영화는 이 회피를 미학적 선택으로 정당화하지만, 실제 버스 운전사의 삶을 살아본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차고지에서 교대를 기다리며 느끼는 피로, 반복 노선이 만들어내는 실제 권태감, 이런 것들이 빠졌을 때 영화가 그리는 삶은 완전히 다른 온도를 갖게 됩니다.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에 따르면 버스 운전사의 연평균 소득은 약 48,000달러 수준으로, 미국 전체 중간 가구 소득 대비 낮은 편에 속합니다(출처: 미국 노동통계국). 영화가 그 경제적 현실을 단 한 번도 화면 안으로 끌어오지 않는다는 점은, 예술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현실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패터슨이 갖는 힘은 분명합니다. 아카이빙(archiving)된 일상의 아름다움, 즉 매일 지나쳐버리는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붙잡아두는 행위의 가치를 이렇게 조용하게 설득하는 영화는 드뭅니다. 여기서 아카이빙이란 특정 순간이나 정보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행위를 말합니다(출처: 영국영화협회 BFI).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은 특별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 그 메시지만큼은 과장 없이 전달됩니다.
영화 패터슨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한 편 먼저 읽고 보시길 권합니다. 관념이 아닌 사물로 말하는 글쓰기가 어떤 감각인지 몸으로 알고 나면, 주인공이 점심 도시락 옆에 노트를 꺼내 쓰는 짧은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겁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두 번째 볼 때 더 많은 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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