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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더 보이즈 (창작 슬럼프, 번아웃, 글쓰기 강박)
영화 원더 보이즈 (창작 슬럼프, 번아웃, 글쓰기 강박)

 

 

 

원고 파일을 열어만 놓고 한 줄도 못 쓴 채 창을 닫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도 꽤 오랫동안 그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영화 《원더 보이즈》를 보다가 화면 속 그레이디 트립 교수의 모습에서 제 자신을 발견한 순간,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창작자의 슬럼프와 번아웃을 이토록 정확하게 포착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창작 슬럼프, 나만 이러는 게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웹 소설과 브런치 연재를 병행하던 시절, 저는 스스로를 꽤 성실한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밤 키보드를 두드렸고, 파일 용량은 꾸준히 늘어났으니까요. 문제는 그 분량이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처음 의도했던 핵심 서사는 사라지고, 곁가지 설정과 배경 묘사만 비대해진 원고가 모니터 속에 쌓여갔습니다.

영화 속 트립 교수가 딱 그랬습니다. 2,600장이 넘는 원고를 7년째 붙들고 있지만 결말은 없었습니다. 창작계에서 이런 상태를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이라고 부릅니다. 라이터스 블록이란 글을 쓰는 능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완성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이 뒤엉켜 창작 흐름 자체가 멈춰버린 심리적 교착 상태를 말합니다. 무언가를 계속 쓰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하는 역설, 저는 그걸 몇 년 동안 겪었습니다.

 

창작자의 번아웃(Burnout)은 무기력함과는 다릅니다. 번아웃이란 과도한 몰입과 에너지 소진이 누적되어 정서적·인지적 고갈 상태에 이르는 현상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공식 직업 현상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직업적 맥락에서의 만성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라고 설명합니다(출처: WHO). 창작자에게 글쓰기는 직업이자 정체성이기 때문에, 번아웃이 왔을 때 그 타격이 유독 깊을 수밖에 없습니다.

 

창작 슬럼프가 찾아올 때 주로 나타나는 신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파일을 열어도 첫 문장이 나오지 않고 계속 수정만 반복한다
  • 분량은 늘어나는데 스토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 완성보다 설정 보완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 데뷔작 혹은 전작과의 비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저는 이 네 가지를 거의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게 슬럼프인 줄도 몰랐고, 그냥 더 열심히 쓰면 해결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번아웃 뒤에 찾아온 해방, 그 이상한 감각

노트북이 완전히 침수된 날 밤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며칠을 공들인 챕터가 아니라 몇 년치 미완성 원고가 통째로 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틀쯤 지나자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왔습니다. 무거운 짐을 오래 들고 있다가 내려놓은 것 같은 그 감각, 제가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이게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트립 교수의 원고가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 그것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해방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험을 강제된 재설정(Forced Reset)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강제된 재설정이란 외부 충격으로 인해 기존의 집착이나 루틴이 물리적으로 끊기면서 오히려 새로운 인지 공간이 열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상실이 창작의 출발점이 되는 역설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원고를 잃기 전까지 저는 '이걸 완성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지, '이걸 왜 쓰고 싶은가'는 오래전에 잊고 있었습니다. 파일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질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본질이 뭔지, 그 첫 문장이 뭔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트립 교수도 원고를 잃고 나서야 제자 제임스의 재능을 온전히 인정하고 그를 돕는 쪽으로 에너지를 돌립니다.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창작적 성숙의 시작이라는 점을 영화는 아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지점이 《원더 보이즈》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글쓰기 강박, 그리고 영화가 낭만화한 것들, 진짜 문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저는 이 영화에 대해 마냥 따뜻한 시선만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창작자의 방황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수작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영화가 슬쩍 덮어두는 것들이 꽤 있습니다.

트립 교수는 제자가 저지른 문제를 은폐하고 공범을 자처합니다. 영화는 이를 '순수한 연대'처럼 그리지만, 이는 기성 예술가의 특권 의식과 자기 연민을 낭만화한 것에 가깝습니다. 임신, 이혼, 직업적 위기 같은 복잡한 현실 문제들이 원고가 바람에 날아가는 단 하나의 장면으로 해소되는 결말 역시, 서사의 편의를 위한 무책임한 봉합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창작적 번아웃을 다룬 연구에 따르면, 번아웃 회복에 가장 효과적인 요소는 극적인 사건보다 지속적인 사회적 지지와 구체적인 루틴 재건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은 감동적이지만, 현실에서의 번아웃 극복은 그렇게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더글라스와 토비 매과이어의 연기 앙상블은 이 엉망진창인 이야기에 기묘한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 즉 이야기 속 인물이 갈등을 통해 내적으로 변화해 가는 구조라는 면에서, 트립 교수의 여정은 불완전하지만 진짜처럼 느껴집니다.

창작 슬럼프를 겪고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가 제시하는 해결 방식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원고가 날아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지금 파일 속에 쌓인 것들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저는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진짜 첫 문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싶은 이유를 다시 찾는 것, 그게 슬럼프를 빠져나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rW6IvaHu-q4&t=119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