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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이 영화 리빙(2023)을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겹쳐졌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사람이 비로소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는 것, 이 영화는 그 진부해 보이는 명제를 놀라울 만큼 조용하게 증명해 냅니다. 몸이 많이 아팠던 어느 날 검진 결과 '양성 반응'이라는 글귀를 보고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무언가 내 몸에서 큰일이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도 찹찹하고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후회스럽고 원망도 하고 스스로에게 질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건강했던 20~30대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씩 내려놓는 시기가 바로 이럴 때 이구나 싶어서 다시금 마음잡고 새롭게 생각하고 이제 남은 시간을 다르게 살아야겠다는 기획을 세웠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영화입니다.
무기력을 넘어선 마지막 헌신
영화 《리빙:어떤 인생》은 2023년 개봉한 영국 영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작 이키루(生きる)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이키루란 일본어로 '산다'는 뜻이며, 관료제 속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한 남자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진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주인공 윌리엄스는 영국 시청의 중년 공무원입니다. 수십 년을 같은 시간, 같은 복장, 같은 자리에서 보낸 그에게 어느 날 6개월 시한부라는 통보가 떨어집니다. 그는 처음으로 결근을 하고, 해변을 방황하고, 향락을 좇아보지만 공허함만 밀려옵니다. 평생 놀 줄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쾌락을 좇는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은 없었던 거죠.
제가 그날 바닷가에서 느꼈던 것도 비슷했습니다. 버스킹 밴드의 연주를 들으며,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뭔가 해방된 것 같았지만 동시에 묘하게 공허했습니다. 자유를 제대로 소화하는 법을 몰랐던 거였죠. 윌리엄스의 방황이 유독 낯설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거창한 버킷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수년째 부서를 떠돌며 처리되지 않던 작은 청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 하나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실존적 각성(existential awakening)이란 거대한 자아실현이 아닙니다. 실존적 각성이란 쉽게 말해,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에 온 에너지를 쏟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리빙이 원작과 구별되는 지점도 여기서 드러납니다. 원작 이키루는 주인공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리빙은 신입사원 웨이클링의 시선을 서두와 말미에 배치하는 액자식 서사 구조를 취합니다. 액자식 서사 구조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를 품는 방식으로, 중심인물의 삶을 외부인의 눈으로 관찰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덕분에 관객은 윌리엄스의 변화를 보다 객관적으로, 그러나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리빙에서 주목할 만한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원작: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작 이키루(일본)
- 배경 전환: 전후 일본 관청 → 영국 산업 사회 시청
- 서사 구조: 액자식 서사(웨이클링의 시선 추가)
- 주연: 빌 나이 (2023년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 각성의 계기: 시한부 선고 후 놀이터 청원 처리
시대적 메시지와 삶의 태도
일반적으로 리빙은 이키루의 충실한 재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두 작품을 비교해 보니, 충실하다기보다는 '온화하게 순화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는 페이소스(pathos)가 매우 강렬합니다. 페이소스란 관객의 감정을 깊이 자극하여 연민이나 슬픔을 이끌어내는 미학적 효과를 말합니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완성한 놀이터 그네 위에서 쓸쓸히 노래를 부르며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가슴을 후벼 파는 날 것의 충격으로 유명합니다.
반면 리빙의 윌리엄스는 훨씬 절제되고 품위 있게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빌 나이의 연기 자체는 섬세하고 정교합니다. 과하지 않은 표정 하나하나가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가졌던 날카로운 사회 비판적 메시지, 관료제의 구조적 폭력성에 대한 고발은 영국식 휴머니즘의 따뜻한 톤 아래 다소 뭉개진 느낌이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안전한 변주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영화 비평의 관점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을 살펴봐도 이 차이는 뚜렷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속 공간 구성, 조명, 의상, 배우의 배치 등 시각적 요소 전반을 가리키는 영화 용어입니다. 이키루의 음산하고 거친 흑백 화면에 비해 리빙의 영상은 1950년대 영국을 부드럽고 회화적으로 재현합니다.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만큼 원작의 날 것 같은 불편함은 걸러집니다.
실제로 영화 비평 분야에서 리메이크 작품이 원작의 문화적 맥락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는 중요한 연구 주제입니다.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에 따르면, 동아시아 영화가 서구권에서 리메이크될 때 원작의 집단주의적 정서가 개인주의적 감정으로 치환되는 경향이 관찰된다고 합니다(출처: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리빙의 변화 역시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리빙이 지금 시대에 더 필요한 영화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 개인의 업무 영역을 빠르게 대체하는 지금, 시스템 속 부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충격보다 조용하고 따뜻한 각성일 수 있으니까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분석에 따르면, 2020년대 이후 국내 관객들이 선호하는 외국 영화의 특성 중 '감정적 울림'과 '삶의 의미 탐구'가 상위 항목을 차지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리빙이 국내에서도 입소문을 탄 것은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리빙은 보는 내내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출근하고 있습니까. 저도 그날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그 질문을 제대로 들었습니다. 결과가 단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파도 소리와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던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유한함을 직감하는 순간에만 켜지는 감각이 따로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끝난 뒤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관료제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좀비로 살지 말라는 윌리엄스의 조용한 인수인계는, 사실 모든 직장인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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