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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유나의 거리(2014) - 달동네 공존, 캐릭터 서사, 인간 드라마
한국 드라마 유나의 거리(2014) - 달동네 공존, 캐릭터 서사, 인간 드라마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 대충 예상했습니다. 소매치기 여자와 착한 노가다 청년이 만나서 사랑하는, 그런 뻔한 이야기겠거니 했죠.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한국 드라마《유나의 거리》는 달동네 다세대주택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전과자·조폭·노인·백수가 한 지붕 아래 엉켜 살며 서로의 상처를 무심하게 채워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달동네가 만들어 낸 공존의 공간

일반적으로 달동네 배경 드라마라고 하면 가난과 비극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유나의 거리》는 그 공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은 단순한 '가난의 증거'가 아니라,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필연으로 작동합니다.

다세대주택이라는 설정은 드라마 서사에서 앙상블 캐릭터 구성(ensemble cast structure)을 가능하게 합니다. 여기서 앙상블 캐릭터 구성이란, 주인공 한 명이 아닌 여러 인물이 동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입니다. 덕분에 도끼 형님, 한 사장 부부, 노인, 유나, 미선, 창만이 각자의 사연을 펼치면서도 서로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엮입니다.

 

제가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도끼 형님이 망치의 아지트로 홀로 찾아가는 부분입니다. 다리도 불편한 노인이 젊은 건달 앞에 단신으로 들어서는 그 장면, 저는 처음엔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만 봤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나 아직 살아 있다'는 한 노인의 절박한 존재 증명에 가까웠습니다. 요양 시설도 아닌 달동네 셋방에서, 기초생활수급비 32만 7천 원으로 버티는 삶. 그 삶의 무게가 망치 앞에서의 행동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 공간이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제작진이 미장센(mise-en-scène)을 통해 공간의 층위를 세밀하게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인물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을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 폐업한 지 오래된 병원 건물, 낡은 보일러, 이 모든 것이 인물들의 감정과 사회적 위치를 대신 말해 줍니다.

 

 

캐릭터 서사가 드라마를 살리는 방식

일반적으로 범죄자 출신 캐릭터가 나오는 드라마는 그들의 과거를 자극적으로 소비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유나의 거리》는 다릅니다. 유나의 소매치기 행각을 전면에 내세우되, 그것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행동이 왜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 그 구조적 맥락을 차분하게 쌓아 갑니다.

 

캐릭터 서사(character arc)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캐릭터 서사란, 인물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내면적으로 변화하거나 성장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유나의 캐릭터 서사는 단순한 갱생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순간들에 집중됩니다. 스스로를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해 온 사람이, 창만의 시선 안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다시 발견해 나가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는 지점입니다.

 

창만이라는 인물도 비슷합니다. '착한 이방인이 불량한 세계를 교정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창만은 교정자가 아닙니다. 그도 이 공간에서 구원받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일도 없고, 돈도 없고, 기댈 곳도 없던 그가 도끼 형님과 노인과 유나 곁에서 조금씩 살아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이 드라마가 진짜 빛나는 장면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도끼 형님이 망치에게 홀로 찾아가 맞짱을 뜨는 장면 — 존재 증명의 서사
  • 유나가 창만의 방에서 처음으로 잠을 청하는 장면 — 경계를 허무는 순간
  • 노인이 잠결에 "순남이"를 부르는 장면 — 드러나지 않은 과거의 무게
  • 창만이 유나 아버지 장례식장을 홀로 찾아가는 장면 — 말 없는 연대

한국 드라마 연구에서도 앙상블 구성이 시청자 몰입도에 미치는 영향은 꾸준히 주목받아 왔습니다. 서사 구조의 다층성이 시청자의 감정 이입 범위를 넓힌다는 분석은 국내 방송 연구에서도 확인됩니다(출처: 한국방송학회).

 

 

 

인간 드라마로서의 《유나의 거리》가 남긴 것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계속 떠올린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서로를 떠나지 않는가?" 이익도 없고, 의무도 없고, 혈연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왜 같은 지붕 아래서 서로를 챙기는 걸까요.

내러티브 공동체(narrative community)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 공동체란, 공통된 경험과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유대 관계를 뜻합니다. 혈연이나 제도 없이도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온 사람들은 결국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유나의 거리》는 그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 안에 조용히 담아낸 작품입니다.

 

일반적으로 장르물은 갈등의 해소로 끝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드라마는 해소보다 공존에 집중합니다. 갈등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도,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것이 현실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제 경험상 현실의 관계는 대부분 그렇게 작동합니다. 극적인 화해보다는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으로 유지됩니다.

한국 드라마 시청 행태 연구에서도 인간관계 중심 서사가 장기 기억에 더 강하게 남는다는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유나의 거리》가 방영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저는 아직도 몇 장면이 생각납니다. 도끼 형님의 등 문신 이야기, 창만이 유나에게 "소매치기 못 하게 만들겠다"고 말하는 장면. 그 장면들이 오래 남는 이유는 잘 만든 연출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이 드라마가 진심으로 보여 줬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1화부터 천천히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