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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2014 영화 리뷰 - PCT 트레일, 치유 서사 그리고 생존 기록
와일드, 2014 영화 리뷰 - PCT 트레일, 치유 서사 그리고 생존 기록

 

 

고통받는 몸을 보면, 우리는 정말 용서받았다고 느끼는 걸까요? 혹한으로 몰아세우며 한계에 도달하는 익스트림이나 강한 자극의 운동. 자신의 몸과 정신을 상기시키려는 자발적인 스피드 한 운동. 나의 잘 못이나 반성을 이런 한계에 달하는 운동이나 행동으로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와일드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평점 9점짜리 힐링 영화라는 말에 가볍게 틀었다가, 화면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와일드에 대한 리뷰이자, 그 영화가 건드린 상처에 대한 솔직한 기록입니다.

 

 

PCT 트레일, 걷는다는 것의 의미

PCT(Pacific Crest Trail)란 미국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약 4,300km를 종주하는 장거리 트레킹 루트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대륙을 두 발로 세로로 가르는 길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쉐릴 스트레드는 이 길을 하이킹 경험도, 야영 경험도 전무한 상태로 혼자 출발합니다.

 

제가 처음 이 설정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거 가능한 거야?" 너무 무모함을 낭만으로 포장한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와일드' 영화를 보니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배낭을 처음 멨던 날, 어깨가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죄책감도, 후회도, 엄마 목소리도 전부 쑤셔 넣고 출발했는데, 그게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무게였습니다. 쉐릴이 요리 연료를 잘못 챙겨서 차가운 죽을 물에 타 먹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비로소 이 영화가 진짜라는 걸 느꼈습니다. 낭만이라고는 1그램도 없는 장면이었으니까요.

 

걷는다는 행위가 사유의 공간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봅니다. 걷는다고 저절로 사유가 오는 게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이 흘러들어오는 겁니다. 쉐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하비(Mojave) 사막의 40도 열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판단해 왔는지를 처음으로 똑바로 마주합니다. 그 장면은 대사가 없었지만, 제가 본 어떤 독백보다 더 크게 들렸습니다.

 

 

치유 서사의 한계, 그리고 솔직한 반박

이 영화를 '치유의 서사'로 읽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독법이 영화를 오히려 축소한다고 생각합니다. 쉐릴 스트레드는 착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고, 헤로인(heroin)에 중독됩니다. 헤로인이란 모르핀에서 합성된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로, 신체적 의존성이 매우 빠르게 형성되는 물질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조차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그 공백을 약으로 채웠습니다.

 

영화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PCT 완주 하나로 이 모든 것이 봉합되는 것처럼 읽기도 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적인 아버지, 무너진 가정, 중독이라는 구조적 상처를 '혼자 걷기'로 해결할 수 있다는 서사는, 현실에서 걸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중독 회복 연구에서는 물리적 환경 변화만으로는 심리적 회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에 따르면, 약물 의존성 회복에는 인지행동치료(CBT)와 지속적인 사회적 지지망이 필수적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약물남용연구소(NIDA)). 여기서 인지행동치료(CBT)란 부정적인 사고 패턴을 인식하고 수정하는 심리치료 기법으로, 중독 외에도 우울증, 불안장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검증된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와일드는 잘못된 영화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치유를 완성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쉐릴은 PCT를 완주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자신이 버텼다는 사실 하나를 처음으로 믿게 됐을 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플래시백 구조와 감독의 연출 의도

와일드를 단순한 힐링물과 구분짓는 건 감독 장 마크 발레(Jean-Marc Vallée)의 연출 방식입니다. 그는 플래시백(flashback)을 파편처럼 배치합니다. 플래시백이란 현재 시점의 서사를 중단하고 과거 장면을 삽입하는 영화적 기법으로, 관객에게 인물의 심리적 시간을 체험하게 합니다. 여기서 발레가 선택한 건 순차적 회상이 아니라 비선형적 편집입니다. 비선형적 편집이란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고 감정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구조를 처음 접했을 때 "이 감독, 관객을 믿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뢰. 쉐릴의 기억은 선형적이지 않고, 그래서 관객도 그녀의 뇌 속을 함께 걷는 느낌을 받습니다. 길을 잃은 날 밤처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다음 발을 내딛는 것처럼요.

 

쉐릴이 텐트에 맺힌 이슬을 핥아 목을 축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살아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방식으로. 와일드의 진짜 가치는 회복의 드라마가 아니라 생존의 기록에 있습니다. 그 비루하고 아름답지 않은 순간들이 이 영화를 9점짜리로 만든 이유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PCT 완주에서 주목할 만한 구간별 특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모하비 사막 구간: 기온 40도에 육박하는 극한 환경, 수분 관리 실패 시 생존 위협
  •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산맥 구간: 눈과 고도로 인한 길 상실 위험, 체력 소모 극대화
  • 오리건·워싱턴 구간: 고립감과 반복이 누적되는 심리적 한계 구간

 

쉐릴 스트레이드라는 인물이 불편한 이유

와일드는 작가 쉐릴 스트레이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실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종종 주인공을 영웅화하는 함정에 빠지는데, 이 영화는 그걸 상당 부분 피해 갔습니다. 쉐릴은 영웅이 아닙니다. 그녀는 사냥꾼을 만났을 때 두려움에 떨고, 고인 물을 필터로 거르며 살아남고, 도움을 받은 트럭 안에서 권총을 발견하고 순간 얼어붙습니다.

 

와일드 영화를 본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길을 잃은 날 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툴툴 거리면서도,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면서도, 맹목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었습니다. 그게 용기인지 무감각인지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쉐릴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게 달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불편한 이유는, 그녀가 우리와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애도를 못하고, 관계를 망치고, 도망치듯 결정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남자들도 힘들다는 PCT 트레일을 완주합니다. 이 사실이 위로인지 도전인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저에게는 위로였습니다. 가장 무거웠던 건 배낭이 아니라 아직 용서하지 못한 저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말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요.

 

영화의 심리적 효과에 대해 미국심리학회(APA)는 내러티브 노출(narrative exposure), 즉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간접 체험하는 과정이 공감 능력과 자기 이해를 높이는 데 유효하다고 밝혔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여기서 내러티브 노출이란 이야기 형식을 통해 감정을 안전하게 경험하고 처리하는 심리적 과정을 말합니다. 와일드가 단순 감상용 영화를 넘어 오래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영화 '와일드'는 완주 후에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걷는 사람들의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용감한 여성의 성장담'이 아니라 '버텼다는 사실 하나를 믿기까지의 과정'으로 읽기를 권합니다. 쉐릴 스트레드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아마 그 이야기가 어딘가 당신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불편함이 사라지기 전에 한 번 더 보십시오. 두 번째 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