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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일상이 숨 막히게 느껴진 적 있으신가요. 저도 몇 년 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일을 반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2023년 개봉작 Eileen은 바로 그 감각을 스크린에 정확하게 포착한 영화입니다. 앤 해서웨이의 압도적인 연기와 1960년대 미국의 서늘한 공기가 맞물리며, 이 영화는 단순한 심리 스릴러를 넘어 자아 탈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채색 일상 속에 갇힌 아이린
1960년대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마을. 아이린은 알코올 의존증(Alcohol Use Disorder) 아버지와 함께 살며 소년 교도소 비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코올 의존증이란 단순한 음주 습관이 아니라, 일상 기능 자체가 음주 여부에 종속되는 만성 질환을 의미합니다. 아이린의 삶은 그 의존증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일종의 감옥이었습니다.
제가 이 도입부를 처음 봤을 때, 영화가 '가난하고 불행한 여자'의 신세 한탄을 그리는 것이라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평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는 아이린의 무기력함을 감상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조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관객이 감정이입 대신 관찰자의 위치에 서도록 유도합니다.
앤 해서웨이가 만들어낸 리베카
리베카 박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저는 솔직히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앤 해서웨이는 완벽한 외모와 지성을 갖춘 인물을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서늘함을 리베카에게 심어놓았습니다. 이 인물이 구원자인지 악인인지 끝까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그것이 앤 해서웨이 연기의 핵심입니다.
리베카는 아이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지하에 결박된 인물을 보여주며 정의를 구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도덕적 모호성(Moral Ambiguity)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도덕적 모호성이란 선악의 경계가 흐려져 관객이 단일한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만드는 서사 전략을 말합니다. 리베카의 제안은 분명히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아이린이 평생 억눌러온 어떤 본능에 정확하게 응답합니다.
앤 해서웨이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평단의 반응도 일치하는 편입니다. 미국 영화 비평 집계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이 영화는 비평가 점수 76%를 기록했으며, 특히 해서웨이의 연기가 영화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저도 그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자아 탈출의 방식,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리베카는 실존 인물인가, 아이린의 환상인가."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그 모호함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라고 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 구조는 투사(Projection) 기제와 연결됩니다. 투사란 자신이 인정하기 어려운 욕망이나 감정을 외부 대상에게 귀속시키는 방어 기제를 의미합니다. 아이린이 리베카를 통해 느끼는 자존감, 욕망, 폭력적 충동은 실은 아이린 내면에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들일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을 따르면 리베카는 아이린이 스스로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 즉 그림자 자아(Shadow Self)에 가깝습니다.
OST, 소품 그리고 감독이 숨겨둔 디테일
영화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OST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1960년대 미국 팝과 재즈가 혼합된 사운드트랙은 시대적 배경을 사실감 있게 구현하면서, 동시에 아이린의 억눌린 감정과 묘하게 충돌합니다. 달콤한 멜로디가 흐르는 장면에서 벌어지는 어두운 사건들, 그 간극이 영화 특유의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OST와 소품에서 주목할 세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Be My Baby – The Ronettes | 유튜브에서 듣기 | 아이린이 리베카를 처음 보고 이끌림을 느끼는 장면에 흐르는 곡으로, 달콤한 멜로디와 집착에 가까운 감정 사이의 간극을 날카롭게 표현합니다. 욕망이 시작되는 순간을 음악으로 각인시키는 선택이었습니다.
- Cry to Me – Solomon Burke | 유튜브에서 듣기 | 소울 장르 특유의 깊은 울림이 아이린의 고독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이 곡은, 정서적 공허함을 음악으로 채우는 영화의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 He's a Rebel – The Crystals | 유튜브에서 듣기 | 리베카가 아이린에게 함께 행동하자고 제안하는 시퀀스와 연결되는 곡입니다. 반항과 자유를 노래하는 이 곡이 폭력적 선택의 배경으로 깔린다는 점에서, 감독의 의도적인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영화를 살린 감독의 디테일한 살린 소품
• 아이린이 항상 걸치는 낡은 오버코트: 그녀가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는 방어막을 상징합니다.
• 리베카의 집 지하에 놓인 의자와 밧줄: 단순한 공포 소품이 아니라, 아이린이 무의식적으로 원해온 '통제권'의 물질적 표현입니다.
• 그리고 영화 내내 등장하는 창문: 아이린이 바깥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끝내 넘어서지 못하는 경계선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킵니다. 이 세 가지 소품은 각각 억압, 욕망, 한계를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영화에서 시각 상징(Visual Symbolism)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설계되는지에 대한 연구는 영화학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로튼토마토 외에도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와 같은 전문 영화 비평 매체에서 시각적 연출을 분석한 글들을 읽어보면 감독의 의도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출처: CinemaScope).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심리 스릴러보다 인물의 내면을 천천히 파고드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
- 앤 해서웨이의 새로운 연기 스펙트럼이 궁금한 분
- 명확한 선악 구분 없이 도덕적 모호성을 즐길 수 있는 분
비슷한 분위기의 영화를 더 보고 싶다면 토드 필드 감독의 타르(TÁR, 2022)와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원작의 리플리(Ripley, 2024)를 권합니다. 두 작품 모두 자아와 욕망, 그리고 도덕적 경계에 대한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리뷰 참고 영상]: www.youtube.com/watch?v=CmfgaNFuvLw&t=425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