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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했다 (메멘토 모리, 시한부, 삶의 주체성)
영화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했다 (메멘토 모리, 시한부, 삶의 주체성)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그냥 멜로드라마 한 편 보겠다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로니카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하루를 갈망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제 과거가 겹쳐 보이며 예상치 못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서야 삶이 얼마나 눈부신지 깨닫는 역설,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찌릅니다.

 

 

메멘토 모리와 시한부 - 죽음을 선고받은 뒤에야 보이는 것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대충 흘려보내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말입니다.

영화 속 베로니카는 반복되는 일상과 뻔히 보이는 미래에 지쳐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합니다. 그녀가 죽음을 택한 진짜 이유는 고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것이 너무나 뻔하다는 무기력함, 그리고 세상이 점점 나빠지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감이었습니다. 저도 그 감각을 압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과 환경 속에서도 내면이 텅 비어 가는 느낌,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으니까요.

 

시도는 실패했고, 베로니카는 빌레트라는 정신병동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심각한 심장 손상으로 인해 남은 수명이 일주일뿐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듣게 됩니다. 죽고 싶었던 사람이 막상 진짜 죽음의 기한을 통보받은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도 그 각성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압니다. 정말로 끝이 정해지자, 매일 스쳐 가던 풍경과 사람들의 미소가 갑자기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거든요.

 

이 서사 구조는 철학 용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란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유한한 삶을 의식함으로써 오늘을 더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자극하는 고대 로마의 철학적 경구입니다] 영화는 이 개념을 베로니카의 시한부 판정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통해 체험적으로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시한부 판정이 사실 박사의 거짓말이었다는 반전입니다. 이를 두고 단순한 신파적 반전 장치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스스로를 해치려 했던 사람이 다시 그 시도를 반복하는 재시도율(Reattempt Rate)은 상당히 높습니다. 재시도율이란 첫 번째 자해 또는 자살 시도 이후 일정 기간 내에 같은 행동을 다시 시도하는 비율을 뜻하는데,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첫 시도 이후 1년 이내 재시도 위험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 WHO). 박사의 거짓말은 그래서 단순한 극적 장치가 아니라, 베로니카가 삶의 주체성을 되찾을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임상적 개입에 가까운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베로니카의 변화 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시한부 선고 이후 병동의 피아노를 다시 치기 시작하며 억눌린 자아를 회복
  • 타인과의 단절 대신 병동 사람들과 교류하며 감정적 연대를 경험
  • 죽음이라는 명확한 끝을 의식한 순간 오늘 하루의 밀도가 달라지는 각성
  • 자신의 열정을 주변인(에드워드, 마리)에게 전파하며 삶의 에너지가 순환

 

 

삶의 주체성 - 정상/비정상의 경계, 빌레트 안의 사람들 

여기서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영화 속 빌레트 정신병동에는 단순히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처럼 이미 회복 단계에 접어들었음에도 바깥 세상, 즉 사회라는 감옥이 두려워 병동을 떠나지 못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이 설정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묵직합니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

 

베로니카와 에드워드는 그 질문의 중심에 있는 두 인물입니다. 화가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억눌렀던 에드워드, 피아노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포기했던 베로니카. 두 사람 모두 한때는 삶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열정이 꺾인 자리에 무기력과 자기 소외(Self-alienation)가 자리 잡았던 것이죠. 자기 소외란 개인이 자신의 욕망이나 가치로부터 단절되어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심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가 직접 그 감각을 경험해봤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거울을 봐도 낯선 얼굴이 보입니다. 베로니카가 병동의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 저는 그 장면을 보며 울었습니다. 그게 단순한 연주 장면이 아니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자기 자신을 끄집어내는 행위였으니까요.

 

영화의 원작은 1998년 출판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입니다. 코엘료는 실제로 10대 시절 세 차례에 걸쳐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으며, 이 경험이 소설의 디테일한 묘사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전 세계 80개국 이상에서 출판되었으며, 코엘료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자전적인 소설로 평가받습니다(출처: 파울로 코엘료 공식 사이트).

 

다만 제가 아쉬웠던 부분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작이 가진 서사적 깊이, 즉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나 각 환자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이, 영화 중반부 이후로 갈수록 베로니카와 에드워드의 로맨스 내러티브(Romance Narrative)에 밀려 약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맨스 내러티브란 두 인물의 감정적 결합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는 이야기 구조를 뜻합니다] 물론 그 로맨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박사의 거짓말이 주는 윤리적 무게, 즉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이 단순한 감동의 도구로 소비된 것은 아쉬운 지점입니다. 저는 그 질문이 더 오래 남았으면 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사랑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 후에 죽는다면 지금 뭘 하고 싶으냐는 질문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죽는다'와 '일주일 뒤에 죽는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전자는 흘려듣게 되고, 후자는 오늘의 행동을 바꿉니다.

만약 지금 하고 싶었지만 미루어두고 있는 일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그 이유를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그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고, 그래서 훨씬 필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여러분의 삶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심리 상담이나 의료 조언이 아닙니다. 만약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은 전문 기관의 도움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참고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YXeNUiEv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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