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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저 시커 (명장면·OST·존엄과 사랑·추천 대상과 총평)
영화 레저 시커 (명장면·OST·존엄과 사랑·추천 대상과 총평)

 

    [목차]

  • 명장면과 연출·서사 구조
  • OST·음악과 감정의 설계
  • 존엄과 사랑
  • 추천 대상과 총평

 

 

곰곰히 생각해 보면 슬픈 영화. '나도 이럴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가 아닙니다.

노부부가 캠핑카 타고 여행한다는 설정,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조합이었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삶을 생각하게 만들었고, 가슴속에서 무언가 짠한 게 느낌이 올라왔었던 영화. 이탈리아 감독 파올로 비르치(Paolo Virzì)가 연출하고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가 주연을 맡은 《레저 시커》(The Leisure Seeker, 2017)는 알츠하이머를 앓는 남편 존과 말기 암을 숨긴 아내 엘라가 1974년 산 캠핑카 '레저 시커'를 몰고 매사추세츠에서 플로리다 키웨스트까지 달리는 로드무비입니다. 마이클 자두리 안(Michael Zadoorian)의 2009년 동명 소설이 원작이고,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헬렌 미렌이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작품입니다.

 

 

📽 명장면과 연출·서사 구조

이 영화의 서사는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공간적 이동(spatial displacement)을 삶의 마지막 챕터와 겹쳐놓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보스턴에서 플로리다까지 이어지는 미국 동부 1번 국도(Old Route 1)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온 시간의 물리적 은유입니다. 감독 비르치는 베니스 영화제 노트에서 이 영화를 "삶의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에 관한 로드무비를, 노래의 단순함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존이 기억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본능적으로 아내의 손을 찾는 순간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인지 기억을 잃어도 신체 습관으로 굳은 절차적 기억(procedural memory)은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사실을, 감독은 대사 한마디 없이 손 하나로 표현합니다. 직접 이 장면을 봤을 때 목이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이 영화가 여느 노년 영화들과 다른 결정적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촬영은 이탈리아 거장 루카 비가치(Luca Bigazzi, 《일 포스티노》·《위대한 아름다움》 촬영감독)가 맡았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화려한 클로즈업 대신 미들 숏(middle shot)을 고집해 두 인물과 공간을 한 프레임 안에 담습니다. 색채 팔레트도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매사추세츠의 선명한 가을빛에서 시작해 플로리다의 과포화된 열대 컬러로 점진적으로 이행하는 구조가, 두 사람이 점점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게 되는 심리 변화와 정확히 맞물립니다. 색온도(color temperature) 변화만으로 인물의 내면 상태를 전달하는 미장센(mise-en-scène)의 교과서적 활용입니다.

"파올로 비르치는 이탈리아 영화인의 습관, 즉 진실·인간미·아이러니, 그리고 희극과 비극의 혼합을 미국 동부 해안에서도 놓지 않으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 출처: La Biennale di Venezia 2017 공식 감독 노트

 

 

 

 

🎵 OST·음악과 감정의 설계

음악이 이 영화에서 하는 역할은 배경이 아니라 공동 서술자(co-narrator)에 가깝습니다. 저는 영화를 분석할 때 음소거 상태로 한 번 더 보는 편인데, 레저 시커는 음악을 빼면 감정의 밀도가 눈에 띄게 떨어지는 드문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오리지널 스코어는 감독의 형제 카를로 비르치(Carlo Virzì)가 작곡했습니다. Sony Classical을 통해 2018년 1월 발매된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현악기 중심의 미니멀한 스코어가 담겨 있습니다. 메인 테마 'Andante'는 이름 그대로 '느리게 걷는다'는 뜻으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영화 전반에 반복 등장하며 여정의 템포 자체를 음악으로 형상화합니다. 'The Love of My Life'는 감정적 절정부에 배치되어,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의 온도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 메인 테마: Andante (Part 1·2·3) — Carlo Virzì
  • 반복 삽입곡: Me and Bobby McGee — Janis Joplin
  • 감정 절정부: The Love of My Life — Carlo Virzì
  • 회상·슬라이드 장면: Slides (Part 1·2) — Carlo Virzì
  • 여정 테마: The King of Route 1 — Carlo Virzì

 

삽입곡 중 핵심은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Me and Bobby McGee'입니다. 이 곡이 반복 모티프(recurring motif)로 기능하는 건 단순한 시대 배경 설정이 아닙니다. "자유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얻는 또 다른 이름(Freedom's just another word for nothing left to lose)"이라는 가사가 존과 엘라의 철학과 정확히 겹칩니다. 죽음을 앞두고 도리어 가장 자유로운 이 부부에게, 조플린의 목소리는 영화 속 또 하나의 대사입니다. 루카 비가치의 촬영이 빛을 색으로 번역한다면, 카를로 비르츠의 음악은 침묵을 감정으로 번역한다고 느꼈습니다.

"카를로 비르츠의 스코어는 영화의 무드에 딱 맞아떨어지며, 재니스 조플린의 'Me and Bobby McGee'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반복 테마곡으로 기능합니다." — 출처: Screen Daily, Venice 2017 리뷰

 

 

 

 

💬 존엄과 사랑

이 영화의 주제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자기 결정권(self-determination)입니다. 의료 시스템과 성인 자녀가 "당신들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때, 엘라는 조용히 캠핑카 시동을 겁니다. 이탈리아 감독이 미국 이야기를 만들면서 끌고 온 것이 바로 이 유럽적 감수성, 즉 삶의 존엄성과 선택의 자유입니다. 고령화 사회가 피할 수 없는 질문—"어떻게 죽을 것인가"—을 이 영화는 설교 없이 로드무비 언어로 꺼냅니다.

동시에 오래된 관계의 민낯도 숨기지 않습니다. 수십 년 전 존의 외도가 드러나는 장면은 미화된 노년의 사랑을 현실로 끌어내립니다. 그럼에도 엘라가 결국 존 곁에 있는 건, 사랑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결함을 포함한 사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전부를 아는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이 영화가 가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 추천 대상과 총평

감정을 세게 밀어붙이는 영화보다, 조용히 옆에 앉아 있어 주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에게 맞는 작품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볼 영화를 찾고 있다면 특히 권합니다. 세대 간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거든요. 생각해 보면 슬프기도, 감사하기도 합니다.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영화의 메시지. 정말 잘 봤습니다. 

비슷한 결의 작품으로는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Amour, 2012)》와 알렉산더 페인의 《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2002)》를 함께 보시길 권합니다. 세 편을 나란히 놓으면 노년과 사랑을 다루는 세 가지 전혀 다른 방식이 보입니다. 헬렌 미렌과 도널드 서덜랜드는 1990년 《베튠》 이후 27년 만에 재회했고, 그 세월이 두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 있어 어떤 연기보다 진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이지만,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입니다. 한 번쯤 꺼내 보실 가치가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