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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독에 대한 기록(Solitude, 2024) 영화 속 리뷰, 고립, 연결, 용기
어느 고독에 대한 기록(Solitude, 2024) 영화 속 리뷰, 고립, 연결, 용기

 

 

고독이 상처가 아니라 습관이라면, 그 습관은 어떻게 깨질까요. 2023년 아이슬란드 영화 어느 고독에 대한 기록은 그 질문에 조용하고 단단하게 답합니다. 저도 25년 살던 동네를 떠나 낯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몇 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고독이 감정이 아니라 몸의 상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즐거웠던 기억 때문인지, 간혹 마음이 힘들 때 예전에 살던 곳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고립을 선택한 사람, 군나르가 보여주는 것

아이슬란드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목장주 군나르는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목장을 정리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키워온 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도시로 향하는 장면은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장면에서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이 얼마나 서서히, 그리고 깊게 사람을 잠식하는지가 느껴졌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고립이란 단순히 혼자 있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망 자체가 소멸된 상태를 뜻합니다. 군나르는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신문 배달 소년 아리가 두고 간 신문을 매번 걷어주는 것을 반복합니다. 대단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관계의 첫 균열이 됩니다.

 

저도 퇴직하고 나서 처음 석 달 동안 아무에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이유가 사라지자 오히려 전화기를 더 멀리 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관계를 정리한 게 아니라, 관계를 맺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군나르가 낯선 소년 아리에게 커피 대신 우유를 내주던 장면이 그래서 묘하게 찔렸습니다. 말없이 손이 먼저 움직이는 것, 저도 엘리베이터에서 택배 박스를 들고 끙끙대는 아이를 봤을 때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동행, 그래도 그날은 이상하게 분위기가 괜찮았습니다.

 

영화에서 주목할 지점은 군나르가 아리를 통해 변화한다는 구조 자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서사 기능(narrative function)이란 이야기 안에서 특정 인물이 맡는 역할을 말하는데, 이 영화는 아리에게 군나르를 구원하는 서사 기능을 부여합니다. 아리 역시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방치된 아이인데, 어쩌다 이 서사는 아이의 상처보다 어른의 치유를 더 정성껏 그렸을까요. 저는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이는 도구가 아닌데, 영화는 그 경계를 종종 흐립니다.

 

군나르가 아리의 고독과 자신의 고독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장면들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리가 짊어진 무게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채 군나르의 변화를 위한 배경으로 소비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사회학에서는 이를 도구적 관계(instrumental relationship)라고 부릅니다. 도구적 관계란 상대방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대하는 관계 방식을 의미하며,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그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할 만한 핵심 관람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사보다 행동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미니멀리즘 연출 방식
  • 이혼 가정, 망명 신청자, 노년의 고독 등 복수의 사회적 소외를 다층적으로 배치한 구성
  • 아이슬란드 특유의 정적인 풍경이 군나르의 내면과 겹쳐지는 시각적 언어

 

 

연결과 용기, 이 영화가 진짜 말하려는 것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군나르는 도시를 떠나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아리의 가족을 찾아갑니다. 오해를 풀고, 먼저 문을 두드립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늦었다는 것을 군나르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을 두드리는 것, 그게 이 영화가 말하는 용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독을 다룬 영화들은 고독을 치유해야 할 상처로 그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그리고 습관은 작은 균열 하나로 무너집니다. 신문을 걷어주는 행동, 우유 한 잔, 축구 경기 관전. 군나르의 변화는 대화나 고백이 아니라 작은 행동의 반복으로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사회적 고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만성적인 고독감은 심혈관 질환 위험을 약 29%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하버드 의과대학 성인 발달 연구). 또한 국내에서도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2023년 기준 국내 1인 가구 비율은 전체 가구의 34.5%에 달합니다(출처: 통계청). 군나르의 이야기가 먼 나라 노인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가 제시하는 연결의 방식도 주목할 만합니다. 거창한 화해나 감동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군나르는 그냥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고, 아이의 신문을 대신 들여놓고, 체스를 같이 둡니다. 정서적 조율(emotional attunement)이란 상대방의 감정 상태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공명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군나르는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그것을 실천합니다. 말이 없어도 연결은 가능하다는 것, 이 영화가 가장 조용하게 전달하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고독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편하게 했습니다. 약하게 내쉬는 한숨으로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어느 고독에 대한 기록은 화려하지도, 너무 다크 하지도 않습니다. 음악도, 대사도, 사건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보고 나면 묘하게 오래 남습니다. 고독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면, 혹은 한때 그랬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군나르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쯤 나의 미래를 곰곰이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