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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에이전트 영화 속 고독과 기찻길 레일 그리고 관계의 의미
스테이션 에이전트 영화 속 고독과 기찻길 레일 그리고 관계의 의미

 

 

아직까지도 저는 혼자가 편하다고 믿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였었습니다. 어릴 적 상처받은 뒤에는 특히 그랬습니다. 세월이 흘러 최근까지도 내면에 두껍게 쌓여져 있는 트라우마 같은 존재는 나를 힘들게 하더군요. 잊었다가도 불쑥불쑥 나옵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2003년 개봉한 톰 매카시 감독의 영화 스테이션 에이전트는 그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 자기방어 였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깊게 건드렸습니다. 자극 없이도 고독의 본질을 꿰뚫는 이 영화가 왜 지금도 회자되는지, 저는 제 경험을 통해 조금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고독을 선택한 사람들이 마주하는 것

혹시 한 번쯤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깊은 배신감을 겪은 뒤, 저는 방 안에 자신을 가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혼도 나고, 노래조차 못 하는 저를 무대 위에 억지로 올려 세워 창피를 당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뒤로 저는 침묵만이 유일한 안식처라 여겼고,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 핀도 비슷합니다. 왜소증(dwarfism)을 가진 핀은 도심 외곽의 장난감 수리점에서 유일한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헨리와 조용히 살아가다가, 헨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뉴저지의 버려진 기차역을 물려받습니다. 왜소증이란 성장호르몬 결핍이나 유전적 요인으로 신체 성장이 제한되는 의학적 상태를 말하며, 핀은 이 외모로 인해 평생 타인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건 자발적 고립이었습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철수(social withdrawal)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철수란 반복적인 거절이나 상처 경험으로 인해 개인이 스스로 대인 관계를 끊어내는 방어 기제를 의미합니다.] 핀이 뉴저지의 낡은 오막살이에서 혼자 책을 읽고, 기찻길을 홀로 걸으며 하루를 보내는 장면들은 그 철수의 일상적 풍경입니다.

그런데 자발적 고립이 과연 안전한가요? 저는 그렇지 않다는 걸 몸으로 먼저 배웠습니다. 집 앞 골목에 푸드트럭이 들어선 날, 주인은 매일 아침 밝은 인사로 제 벽을 두드렸고, 저는 처음엔 그 참견이 불쾌해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다 비가 쏟아지던 날 아무 말 없이 건네진 커피 한 잔에 얼어붙은 마음이 그냥 녹아버렸습니다. 계획도, 드라마도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 조 역시 그랬습니다.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조는 핀에게 특별한 의도 없이 말을 걸고, 음식을 건네고, 그냥 곁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정서적 유대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처럼 의도 없는 반복적 접촉이 신뢰 형성에 핵심적이라고 설명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고 합니다. 단순 노출 효과란 특별한 사건 없이도 반복적으로 접촉하는 것만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핀이 왜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됐는지, 저는 이 개념이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계기가 아니라, 그냥 매일 거기 있어준 사람이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기찻길 레일처럼 나란히 걷는 관계의 의미

그렇다면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에게 스며들까요? 영화는 이 질문을 올리비아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줍니다. 올리비아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스스로를 고립시킨 여성입니다. 저는 처음 그녀를 보면서 속으로 "저 사람, 저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픔의 종류는 달라도, 그 방식이 너무나 낯이 익었기 때문입니다.

올리비아와 핀, 조 세 사람은 도서관에서, 기차역에서, 푸드트럭 앞에서 서로 얽히기 시작합니다. 영화가 탁월한 지점은 이 관계를 급하게 봉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함께 책을 읽고, 육포를 뜯고, 서로가 찍은 영상을 보며 웃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저는 진짜 관계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미 있으려고 만든 순간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다가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들이요.

 

영화의 서사 구조를 분석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내러티브 아크(narrative arc)를 의도적으로 납작하게 유지합니다. 내러티브 아크란 이야기의 감정적 긴장이 상승하다 절정을 거쳐 해소되는 전통적인 플롯 구조를 말합니다. 그런데 톰 매카시 감독은 이 아크를 의도적으로 억누릅니다. 극적인 반전 대신 일상의 텍스처를 쌓는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후반부가 다소 아쉬웠습니다. 잔잔하게 쌓아 올린 유대감이 후반의 갈등 국면에서 조금 작위적으로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잔잔한 일상성의 미학으로 구축한 세계관이 막판에 다소 상투적인 드라마 문법에 기대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난 뒤 핀이 깨닫는 것, 즉 기찻길 레일은 결코 하나로 합쳐지지 않지만 언제나 나란히 목적지까지 함께한다는 장면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이 영화가 고독을 다루는 작품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고독을 치료해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고,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감정적 영토로 확장한다.
  • 관계의 시작을 극적인 사건이 아닌 반복적 일상의 접촉으로 묘사한다.
  • 상처받은 인물들을 구원하거나 변화시키는 대신, 그냥 나란히 걷게 만든다.

 

 

심리학자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의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 고독감은 면역 기능 저하와 심혈관 질환 위험 증가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흡연만큼 건강에 해롭다고 분석된 바 있습니다(출처: University of Chicago, Social Neuroscience Lab). 영화가 단순히 감성적 위로에 그치지 않고 고독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이유가 이 연구 결과와도 맞닿아 있다고 저는 봅니다.

저 역시 고립이 편하다고 믿었던 시간이 사실은 서서히 저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커피를 건네준 그 사람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더 오래 방 안에 머물렀을 겁니다.

결국 스테이션 에이전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관계의 완성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이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하나로 합쳐지지 않아도, 나란히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혹시 지금 스스로를 방 안에 가두고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를 한번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거창한 감동을 기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기찻길 레일처럼,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내용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BOFT3foTk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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