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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2023) 한국 드라마 속 갑질 문화, 직장인 공감 그리고 스펙아웃 채용
레이스(2023) 한국 드라마 속 갑질 문화, 직장인 공감 그리고 스펙아웃 채용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드라마를 보다가 멈춘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레이스 1화에서 PT 장면을 보던 순간, 저도 모르게 리모컨을 내려놨습니다. 화장 안 했다는 이유로 발표 흐름을 끊는 팀장의 말이, 몇 년 전 제 미팅룸 기억과 너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그런 날이 있지 않으셨나요? 직장 상사들의 갑질 문화는 사회 이면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한국 드라마 '레이스' 뿐 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꼭 갑질 문화는 세계 곳곳에 존재합니다. 슬픈 현실이죠. 하지만 그 안에서 꿋꿋이 살아남아 성공하는 사람은 또한 꼭 있습니다.

 

 

PT 현장에서 드러나는 갑질문화의 민낯

여러분은 발표 준비를 밤새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전날 자정까지 자료를 다듬고,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출근했던 날. 팀장이 제일 먼저 한 말은 "오늘 좀 피곤해 보이네요"였습니다. 발표 내용이 아니라 제 얼굴을. 그때 저는 그냥 웃었습니다. 웃어야 했으니까요.

 

레이스에서 PR조아의 대표 박윤조가 세용그룹 홍보사 선정 PT에서 겪는 장면은 그 감각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화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발표 시작 전부터 흐름을 끊어버리는 송선태 팀장. 같은 자리에 있던 남성 대표들은 같은 기준을 적용받지 않았습니다. 윤조가 "남성분들은 화장 안 해도 되나요?"라고 반박하는 장면에서, 저는 숨을 멈췄습니다. 제가 한 번도 내뱉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모 지적이 아닙니다. 조직 심리학에서는 이런 행동을 권력형 괴롭힘(Power Harassment)으로 분류합니다. 권력형 괴롭힘이란 직위나 지위를 이용해 상대방에게 심리적 압박이나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고용노동부의 직장 내 괴롭힘 판단 기준에 따르면, PT 현장에서 외모를 문제 삼아 업무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는 명백한 괴롭힘 요소에 해당합니다(출처: 고용노동부).

레이스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장면이 허구처럼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드라마 속 갑질은 과장이 아니라 재현입니다.

 

 

스펙아웃 채용이 진짜 공정한가, 직장인 공감의 이면

스펙아웃 채용이라는 개념이 드라마 중반부에 등장합니다. 스펙아웃 채용이란 학력, 학점, 어학 점수 등 스펙 조건을 배제하고 실력과 경험만으로 지원자를 평가하는 채용 방식을 말합니다. 드라마는 이를 세용그룹의 혁신적 시도로 그립니다. 저도 처음에는 윤조처럼 두근거렸습니다.

 

하지만 윤조가 입사 후 처음 받은 업무를 보면서 그 두근거림은 씁쓸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뉴스 기사 스크랩. 경력 8년이 통째로 리셋되는 기분. 저도 직접 경험해 봤습니다. 대기업으로 이직한 첫 주, 아무도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 오후 세 시의 그 조용한 모욕감. 그게 어떤 감각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드라마는 스펙아웃 채용의 이상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용은 윤조를 뽑았지만 그녀에게 실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스펙아웃 프로젝트의 홍보용 마네킹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스펙을 걷어냈지만, 그 자리에 이미지 소비라는 다른 착취 방식을 끼워 넣은 셈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공정함이 아닙니다. 제도가 바뀌어도 운용하는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착취의 형식만 달라질 뿐이라는 것을 저는 제 경험상 압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블라인드 채용 도입 이후에도 직무 배치와 승진 과정에서의 불이익은 여전히 유사한 수준으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제도 혁신이 문화 혁신을 자동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레이스가 직장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핵심 장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형식적 PT에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을의 현실
  • 이직 성공 후 기대와 달리 뉴스 스크랩으로 하루를 보내는 신입의 허탈감
  • 실력을 증명하려 할수록 "어디서 일했는지도 모르는 경력"으로 무시당하는 구조
  • 술에 취한 상사를 대신해 캠핑장에서 서울까지 새벽 출근을 완료하는 장면

이 목록이 불편하게 느껴지신다면, 아마 직접 경험이 있으신 분일 겁니다. 응원합니다.

 

 

송팀장을 악인으로만 보는 시선에 반박하고 싶다

한국 드라마 '레이스'를 보는 많은 분들이 송 팀장을 단순한 빌런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시선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처음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회차가 쌓일수록 다른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됐을까.

송 팀장은 조직 위계 구조(Organizational Hierarchy)가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조직 위계 구조란 권한과 책임이 상하 관계로 명확하게 나뉜 직급 체계를 말하는데, 이 구조가 경직될수록 중간 관리자는 위로는 복종하고 아래로는 압박하는 행동 패턴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송 팀장을 미워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만들어낸 시스템 대신 개인 한 명을 처벌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한국 드라마 '미생(2014)'이 10년이 지나도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드라마는 악인을 단죄하는 대신 구조를 드러냈습니다. 오 과장도, 김 부장도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면서도 이해했습니다. 레이스가 미생의 계보를 진정으로 잇고 싶다면, 통쾌한 사이다 장면만큼이나 불편한 질문을 오래 붙들어야 합니다. 저는 시청자로서 그 용기를 이 드라마에 기대합니다.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Life Balance), 흔히 워라밸이라고 부르는 이 개념은 드라마 속 재민의 삶을 통해 아이러니하게 묘사됩니다. 워라밸이란 업무 시간과 개인 생활시간이 균형 있게 유지되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재민은 이를 원하지만 캠핑장에서 한밤중에 기사 대응을 위해 창원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 장면은 대기업이 직원에게 어디까지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명함에 대기업 이름이 찍혀 있어도, 소모품이 되는 건 순식간입니다.

 

레이스는 감성팔이도 신파도 없지만, 보고 있으면 괜히 눈물이 납니다. 특히 미생을 재밌게 보셨거나, MZ세대와 함께 직장을 다니고 있는 분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결국 이 드라마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버텨야 하고, 어디서부터 싸워야 하는가. 레이스를 다 보고 나서도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이 작품이 잘 만들어진 증거일 것입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상영한 한국 드라마 '레이스', 직장생활이 버겁게 느껴지는 날에 한 번 틀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