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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언빌리버블 리뷰 (2차 피해, 수사 연대, 피해자 신뢰)
드라마 언빌리버블 리뷰 (2차 피해, 수사 연대, 피해자 신뢰)

 

 

항상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상상을 하게 됩니다. 결말은 이렇겠지, 저렇겠지- 어떤 특정 영화나 드라마를 상상하며 예정 결말을 상상하게 됩니다. 드라마를 켤 때만 해도 그저 또 하나의 범죄 수사물이겠거니 했는데, 첫 화가 끝나기도 전에 손이 떨렸습니다. 시스템이 피해자를 어떻게 짓밟는지, 그 메커니즘이 너무나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언빌리버블은 2008년부터 2011년 사이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실제로 발생한 연쇄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피해자 마리가 경찰의 압박에 못 이겨 허위 신고를 자백하게 되는 과정과 두 여성 형사의 집요한 수사를 교차 서술한 작품입니다.

 

 

2차 피해와 수사 시스템의 허점

저도 처음엔 이런 일이 드라마 속 과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사정이 달랐습니다. 수년 전 회사 내 횡령 사건을 목격하고 감사팀에 제보했을 때, 돌아온 것은 신뢰가 아니라 의심이었습니다. 조사관들은 제 진술의 사소한 앞뒤 불일치를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피의자가 내놓은 정교한 알리바이 앞에서 저는 점점 거짓말쟁이로 몰렸습니다. 압박이 쌓이고 쌓여 결국 제가 잘못 봤다고, 틀렸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의 공허함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드라마 속 마리가 경찰의 반복된 추궁 끝에 눈물로 진술을 번복하는 장면은 그래서 제게 단순한 픽션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2차 피해(secondary victimization)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2차 피해란 성폭행이나 범죄 피해자가 최초 피해 이후 수사기관, 주변인, 혹은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또다시 심리적 상처를 받는 현상을 말합니다. 경찰은 침입 흔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마리의 진술을 허위로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피해자의 진술보다 물리적 증거를 우선시하는 수사 관행의 전형적인 오류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연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의 상당수가 수사 과정에서 진술의 일관성 부재를 이유로 신뢰성을 의심받는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트라우마 기억이란 비선형적으로 떠오르는 특성이 있어 순서가 뒤섞이거나 세부 사항이 누락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임에도, 수사관들은 이를 허위의 증거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리를 둘러싼 제도적 실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물리적 증거 부재만으로 피해자 진술을 기각하는 수사 관행
  • 트라우마 반응에 대한 수사관의 낮은 이해도
  • 피해자의 과거 심리적 이력을 신뢰도 판단에 활용하는 편향
  • 진술 번복 후 허위 신고 혐의 기소라는 제도적 역설

이 네 가지는 드라마 속 가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 경험상, 시스템이 진실을 외면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비슷한 형태를 반복합니다.

 

 

 

수사 연대와 피해자 신뢰 회복의 조건

두 여성 형사 카렌과 그레이스의 수사 방식은 마리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들과 대조적입니다. 이들은 피해자의 진술을 먼저 의심하는 대신, 여러 사건 사이의 범행 수법(MO)을 분석하고 연결 고리를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MO란 modus operandi의 약자로, 범죄자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특정 행동 패턴을 의미합니다.] 범인이 피해자에게 강제로 샤워를 시켜 DNA 증거를 인멸하고, 범행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방식은 고도로 계획된 MO의 특징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회사 감사 과정을 겪어보니, 진실을 찾는 사람과 진술을 검증하려는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카렌과 그레이스는 피해자를 먼저 믿고 그 믿음을 입증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전개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범인 크리스토퍼 맥카시와 커티스 맥카시 형제를 특정하고, 하드 드라이브에 담긴 30건 이상의 범행 증거를 확보하는 결정적 단서로 이어졌습니다.

프로파일링(profiling)이라는 수사 기법도 이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됩니다. 프로파일링이란 범죄자의 심리적 특성, 행동 패턴, 인구통계학적 특성 등을 분석하여 용의자를 특정하는 수사 방법론입니다. 두 형사는 키, 체형, 직업적 배경(군 출신), 신체적 특징(왼팔 점)까지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범인의 프로필을 구체화했고, 이를 ViCAP(강력범죄 분석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연쇄범임을 확인했습니다. ViCAP이란 Violent Criminal Apprehension Program의 약자로, 미국 FBI가 운영하는 광역 연쇄범죄 데이터베이스를 의미합니다. 이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지역별로 파편화된 사건들이 같은 범인의 소행임을 파악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미국 법무부(DOJ) 산하 국립사법연구소(NIJ)의 보고서에 따르면, 연쇄 성폭력 범죄의 경우 피해 신고율이 전체 발생 건수의 30% 미만에 머무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사법연구소). 이 수치는 마리처럼 신고 후 오히려 허위 신고 혐의로 기소당하는 사례가 반복되는 한, 개선되기 어렵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피해자는 침묵을 선택하고, 범인은 계속 거리를 활보합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리의 고통을 재연하는 초반부 연출이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가학적인 장면을 쌓아 올리면서 시청자에게 감정적 소진을 유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한 후반부 수사 전개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의 플롯 공식에 기대는 경향이 있어, 중반 이후의 긴장감이 전반만큼 날카롭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스템의 실패를 인간적 신뢰로 복원해 내는 두 형사의 연대, 그리고 마리가 뒤늦게 받은 사죄와 합의금 환급을 통해 조금씩 일상을 되찾는 결말은 충분히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저도 훗날 다른 감사관의 재조사로 제 진술이 진실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그 감정을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해방감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무언가가 조용히 풀리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마리가 해변가에서 형사에게 감사 전화를 받는 마지막 장면이 유독 오래 남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언빌리버블은 수사 스릴러를 즐기는 분들보다, 진술이 무시당했거나 억울하게 의심받았던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더 깊이 가닿는 작품입니다. 피해자 보호 제도나 성폭력 수사 절차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국의 경우 여성가족부 산하 성폭력 피해자 지원 체계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DSSC)를 통해 관련 정보를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결국 말하고 싶었던 전부 인지도 모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OdmmpCZjV0